삶
- 양태평 (1992) -
햇볕이 잠시 머물다 간 도시에
추야장(秋夜長) 밤을 도와
가을소리는 깊어만 간다.
한 조각의 시간이 갇힌 거리,
칙칙 소리를 내며 낡은 영상은 돌아간다.
풍요를 구가하는 연회석에
지성의 연막으로 가린 관능(官能)과
흥에 겨워 멍청해진 파리 대왕,
어긋난 음률에도 아랑곳없이
즐겁기에 좋아하는 광대의 춤놀이.
총구를 등뒤에 두고
절룩이며 벼랑을 걷는 수척한 노동자,
허기진 노인을 위로하는
상복 입은 아낙네의 뜨거운 눈물.
존재의 밑바닥엔
끈끈한 샘물이 흐르는데
다시 해포가 지나도
여느 때처럼 비는 내리고,
밤이 가고 아침이 와도
안개는 자욱하다.
낙엽을 애무하고 싶도록
쓸쓸한 이 날.
투명하게 파닥이는 물방울을 보며
반복되는 세월을 사랑해야 한다.
매춘부의 화사한 웃음을 직시하기엔
부족한 유머감각을 지닌 채
살을 비비며
최루탄 가스를 견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