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시집

’80 어느 신입생의 수기(手記)

JK_Y 2009. 9. 16. 11:15

’80 어느 신입생의 수기(手記)

 

- 양태평 (1992) -

 

 

1

 

비둘기의 꿈을 보았는가

 

내 비록 거친 황무지에서 태어났으나

역동하는 젊음이 있어

자유의 마술사 되는 꿈을 꾸노라

 

거창한 날개를 달고 날고 싶음이여

내 정신에 새로운 철조건물을 세우고 싶음이여

 

금단의 열매라도 좋아라

아슬아슬한 모험이라도 좋아라

 

인생은 시간과 공간을 주었나니

나는 무엇으로 내 생활을 채울까

사랑, 진리, 자유, 정의, 우정, 낭만, 교수와의 사귐‧‧‧

나는 무엇으로 내 영혼을 채울까

진실, 용기, 활기, 침착, 집중력, 겸허함, 긍정적 생각‧‧‧

 

아- 가슴이 설레이누나

지나간 고통들이 희망으로 대치되는구나

 

자유로운 몸짓이여

맑고 고요한 마음이여

 

만물아 날 위해 축포를 울려라

사랑의 여신이여 노래하라

평화의 사자여 어서 오라

 

무지개는 설레며

동녘 하늘에 걸리어 있다

 

 

2

 

풀잎의 하소연을 들었는가

 

황량한 도시에 봄이 왔다

휘청거리던 도시의 밤은 결실의 계절을 꿈꾸고 있다

처녀 총각의 마음에도 정치가의 얼굴에도

밝은 햇살이 느껴지누나

 

울려라 정의의 종이여, 쉬지 말고 울려라

민족의 가슴속에 울려 퍼져라

굴러라 차돌멩이야, 깨지지만 말고 언제고 굴러라

어디건 가리지 말고 떼굴떼굴 굴러라

 

그대 젊은이들이여

심장의 뜨거운 피로 하늘을 적셔내라

 

학내의 토론회, 시국에 관한 대자보, 총학생회 후보 정견 발표‧‧‧

교정은 생기에 가득 차서 봄을 구가한다

 

그러나 그러나

춘분이 지나서도 눈은 내리니

서울의 봄은 아직 멀었는가

 

진달래는 촉각을 곧추세우고

바람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다

 

이성은 이내 야만과 뒤엉켜 춤을 추고

감성은 마비되어 가는구나

투쟁이 지성의 상징처럼 숭배되는 안타까움이여

 

“왜 그랬어?”

“나도 몰라, 그러는 게 아닌데 주위 물결에 휩쓸렸어”

 

나는 관찰자, 차라리 멋모르는 구경꾼

그러나 자유민주의 열렬한 신봉자

 

 

3

 

소쩍새의 그리움을 알았는가

 

그녀는 해맑은 수선화로 다가왔다

이른 봄 긴 꽃줄기에 흰 꽃을 물고서 왔다

 

첫 미팅, 처음으로 마주 대하는 젊은 여성

이성에 대한 설렘

 

촌뜨기는 처녀림을 탐험하는 신비로움에 젖어

저무는 가슴에 달 뜨듯 마냥 두근거렸다

 

걷기를 좋아하는 여인

빵을 좋아하는 수수한 여인

나만큼이나 촌티 나는 여대 신입생

 

우리는 불빛 출렁이는 거리를 거닐며

하노버 스트릿의 여주인공을 이야기했다

가정을 가진 여자의 정열적인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찬성, 나는 반대

그래도 마음은 하나

 

조는 가로등불

보랗게 물드는 두 가슴

 

아름다운 소녀와 백마 탄 기사를 얘기하며

첫날부터 나는

다소곳한 그녀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선한 울림, 바로 그것이야

 

 

4

 

벚꽃의 두 마음을 보았는가

 

화려하게 피었다 쉬 지는 그 너저분함

영광의 관을 쓰기엔 너무나 빈약하고 끈기없는 가슴

 

낮을 갈라놓는 마수가 손길을 뻗치기 전에

눈이 녹아야 할 텐데‧‧‧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기엔

도무지 경험없는 의욕

 

새벽을 알리는 닭은 어디에 있는가

목이 비틀어져 죽었는가, 새끼를 돌보느라 헛간에서 노는가

 

행동하는 양심은 어디에 있는가

강간당하고 말았는가,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는가

 

극단적인 정치인에 대한 극단적인 학생들의 반응

눌렸던 용수철의 폭발

광산에선 꽃잎이 검은 피를 토하며 날뛰었다

 

벌레는 꽃그늘에서 음모를 꾸미는데

흔들리는 사회, 무책임한 사람들

당파와 모략의 각축장

 

구린내 나는 지성의 배설물에

자유가 상처입고 신음하누나

 

아- 창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다

제비꽃이 만발한 들판을 달리고 싶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운가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두렵게 하는가

 

허위와 모순 속에서

나의 줏대는?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은

온통 황사로 덮여 있고 심한 바람이 불어치고 있었다

 

 

5

 

도라지의 아픔을 알았는가

 

깊은 산골짝에 고고하게 피어서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그 마음을

 

우리는 손을 맞잡고 효창공원을 거닐었다

좀처럼 슬픔을 모른다던 그녀는 즐겁게 쫑알댔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사랑의 여신은 심술궂게 비뚤어져

배신의 요정을 내려보내는구나

 

들어 보라, 나의 슬픈 이야기를

도라지의 눈물과 구토를, 낭만의 종언을

 

기숙사에 잔치는 벌여졌건만

흥겨운 축제의 노래는 내 귀에 울리지 않는다

 

검사의 아들이 그녀에게 장미꽃을 선사하고

내 사랑은 봉오리 떨어뜨리고 날개치며 날아갔음이여

 

황홀한 시간은 빙하 속에서 거동도 못하고

자하연 연못 속엔 헉헉대는 병자의 넋빠진 모습만이 어른거려

 

아- 독주를 마시고 싶다

백일몽의 노래를 되부르고 싶다

 

비파소리 계속 울리지만

예전처럼 감미롭지 않구나

 

 

6

 

악마의 미소를 보았는가

 

참을성 없는 시대, 참을성 없는 사람들

잘못된 유산을 물려받은 미숙아들

 

까마귀가 코를 킁킁대며

주검을 노리고 있다

 

나부끼는 이념 아래 난동과 봉변의 북새통

벽돌조각은 늘어가고 가스냄새는 독해지는데

나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진땀만 흘리누나

 

피끓는 광란의 정당성을

분별도 못하는 왜소함이여

 

시청 앞 빗줄기 맞으며 처량하게 뒹구는

여학생의 신발이여

내 마음은 너보다도 더 애처롭구나

 

서울역 광장에 자라난

풀잎의 극렬한 몸부림이여

두더지 한 마리 죽어가는구나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속에서

군화의 천둥소리 요란히 들려온다

혼란을 진정시킬 구세주의 신호인가

음흉한 악마의 허울좋은 계략인가

 

아- 그러나 그것은‧‧‧

 

야구방망이 소리 기숙사를 진동시키고

시커먼 발굽 아래 핏빛 사루비아가 떨어져 나뒹군다

 

쇳덩어리 괴물은 유령처럼 학교 마당에 우뚝 서고

대지가 생기를 잃는다

싱싱하던 풀줄기가 시들어간다

 

쓴 맛 다시며 낙향(落鄕)하는

내 오감이 시려오는구나

 

 

7

 

승냥이의 포부를 알았는가

 

입과 귀와 눈이 차단된 와중에도

일간 신문엔 화약냄새와 피냄새가 찌들려 있다

 

욕심은 일어서고

양심은 주저앉는다

 

짓눌린 함성이 분연히 솟구친다

악몽 같은 고통이 천지를 뒤덮는다

 

시간이 억류된 도시, 광주

숨가쁘게 가슴죄어 오는

얼음 동굴

 

피는 자유를 부르기에 힘이 너무 약한가

시련인가, 얄궂은 운명의 화살인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떨어지고

해묵은 꼭두각시는 다시 키를 잡았다

 

공중에

궁전이 건설되었다

 

수치는 이내 망각의 강에 가라앉겠지만

별들은 그 모든 걸 기억하리라

 

봄은 여름‧가을을 거치지 않고 혹독한 겨울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가련한 여인이야

 

 

8

 

종다리의 조상(弔喪)을 들었는가

 

습한 어둠이

엄습하는구나

 

무지 속의 방황으로 생명은 깎여 나가고

밤거리에 비단옷 있으나 그 빛깔을 분별치 못함이여

 

해는 떴으나 이내 비구름 속에 가려지고

나무에 많은 꽃이 피었으나 밤새 도둑이 꺾어 갔도다

 

인생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두려움, 정복할 수 없는 산맥

회색 물결 갈라봐도 건너기 어려운 넓은 강이여

 

무지막지한 시대의 손아귀에 잡혀 인형처럼 춤춰야 하나

뙤약볕 아래서 재롱떠는 광대처럼 오락가락할 것인가

 

애달피 외쳐 봐도 메아리 공허할 뿐

눈동자는 흐려가고 발목은 휘청인다

 

둥지 뺏긴 야생조는 머물 곳을 모르고

의혹의 안개 사이를 난감하게 누빈다

아- 얼마나 잔인한 세월인가

 

세파에 찌든 종달새는

고운 목소리를 안으로만 삭인다

 

내 자신에 대한 약속은

한갓 허언에 불과한가

 

 

9

 

찔레꽃의 가책을 알았는가

 

은둔자의 고요한 음성을 들었는가

그 양심의 쓰라림을 보았는가

 

가을 학기는 시작됐으나 삭막한 정적이 감돈다

파릇파릇한 잔디 교정은 가시만 남은 장미가 허화하게 지키고 있다

 

자유게시판은 송장되어 안치되고

벽보판은 벌거벗은 채 울고 섰다

 

초점 잃은 사만 개의 동태눈깔은

제각기 먹이를 찾아 게슴츠레 꿈적이는데

살랑대는 나뭇잎이 되려 처량하구나

 

선명하던 사색은 포악한 잡념에 맥을 못 추고

희망은 꽁초 되어 짓밟혀 뒹군다

 

아- 정의의 갈증보다 더한

영혼의 굶주림이여, 허기진 심장이여

 

인간의 길이란 자기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임을

왜 몰랐을까

 

 

10

 

소나무의 통곡을 들었는가

 

노력 없이 결과만 바라는 학생, 시험부정행위

교수의 거만한 태도와 무능함

자기만 알고 타인을 모르는 사람, 사람들

 

알맹이 없는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

- 강의가 맘에 들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아도 좋다던 윤리 교수가

출석상황을 성적에 반영하다니

 

바보, 바보, 바보들만 모인 자리

바보 멍텅구리들만 사는 사회

 

강제로 사육된 진리는

영양실조 상태로 쓰러져 있다

 

바보 상태에서 벗어나자

독서에 열중하자

좀 더 현명한 바보가 되자

 

이제껏의 삶을 정리하자

방황‧격정‧울분은 사랑‧용서‧신념 앞에 무릎을 꿇자

현실 상황과 그 속의 모든 인간을 수용하자

모순 속에서 대안을 찾아내자

 

아- 힘이 용솟음치도다

벅찬 기쁨으로 밤잠을 설치도다

 

시‧소설‧수필‧철학 - 정말 좋구나, 달콤하구나

아름다운 인생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 나누나

 

그러나 독서에의 침잠,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또 다른 그물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상의 아름다움이 현실의 추악함을 정화시키기엔

정열이 너무 약할 줄이야

 

 

11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었는가

 

육체는 쇠약해져 휘청거렸다

교정엔 또다시 구호와 최루탄이 난무했다

 

얽어오는 고뇌와 죄어드는 숨통을 가누며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약간의 정화작용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다

내 속에 불탈 만한 연료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고함이라도 질러보자

오- 나의 영혼이여 빛을 발하라

나의 의지여 힘을 발하라,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라

 

말을 듣지 않는구나

살아있던 의식은 해외망명이라도 갔단 말인가

 

인간의 사회화는 필연적으로

타락을 수반하는가

 

일그러진 시간 속에서 나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했다

그들의 문학보다도

그들의 고뇌에 찬 인생을 사랑했다

 

그들의 사생활에 자극받아 밤꽃 피는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으슥한 골목, 진한 화장기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둥켜안고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만족스럽지 못한 추잡한 짓거리

허탈감, 떨떠름함, 찜찜함, 병에 대한 염려‧‧‧

열 일곱 살 소녀에 대한 아픈 동정, 구해낼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

 

그래도 그것은

자신의 굴레로부터의 작은 돌파구임을

 

 

13

 

매화의 눈물을 보았는가

 

환락에의 도피, 아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담담함

왠지 모르게 차분히 가라앉는 마음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일 뿐, 주머니가 비었다

서울의 겨울은 너무 차갑다

 

내가 설 땅은 어디인가

북적대는 집안은 불편스럽다

방랑생활에 대한 동경, 한데 돈이 없다

자연에 대한 동경심도

냉엄한 현실 앞에선 자살해버린 무사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학에 대한 허망함, 극도의 허무감

등록금만이 대학에 다닌다는 미명을 제공할 뿐

대졸이라는 낱말이 사회적 간판을 안겨줄 뿐

배우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 자부심은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골빈 자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눈 언저리에 맴도는 뜨거운 액체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를 끌며

똑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환멸감

 

항로 잃은 쪽배, 험난한 파도에 부서져 정처없이 떠다님이여

일월은 발길을 재촉하는데

내 인생은 뒷걸음질치고

영혼엔 피냄새 자욱히 배어 있다

 

오- 누가 날 위해

진혼곡을 울려다오

 

 

13

 

거지의 합창을 들었는가, 그들의 자유로움을 아는가

 

방황과 갈등은 몸값을 치르고

엄숙한 예포를 울린다

슬퍼서 말하기 꺼려지는 이야기는

산 속에 묻어 두자

 

별이 떨어진다, 쾌락은 연기일 뿐

주위의 유쾌함은 도리어 괴로움일 뿐

 

죽음을 생각했으나

그러기엔 너무 많은 밧줄이 몸을 옭아매고

그것을 끊을 만한 용기가 없다

벗어나려 하면 더 죄어올 뿐

 

흘러가는 물을 보았다

떠도는 구름을 보았다

그래, 모든 것을 포기하자

나는 의식적인 노력을 중지했다

 

머리 속의 쓰레기를 청소하자

방해받지 않는 시공간 속에서

자아와의 소중한 만남을 갖자

철저한 고독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자

 

넓고 푸른 호수가 보인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보인다

그 속에 떠도는 온갖 불순물이 보인다

 

그래, 시지프의 고통을 가중시키지 말자

주어진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어둠 속에 바람이 잠든다

 

 

14

 

반딧불 불빛을 보았는가

 

자- 이제 나에게 희망을 보여다오

나에게 기쁨을 선사하라, 내 입술에 노래가 흐르게 하라

곧이어 새벽이 옴을 믿게 하라

 

나의 짐을 들어다오, 찌든 눈물을 씻어다오

휘청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다오

 

그래도 그리운 음성은 들리지 않고‧‧‧

죽음의 의혹 속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암흑‧적막 - 그런데 그런데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내게로 뻗쳐오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십자가 같았다

 

구원의 빛은 공중 높이 매달린 외줄 끝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경험없는 곡예사

 

가느다란 줄 아래에

악어 떼가 입을 떡 벌리고 있구나

 

떨어질 것인가

구경꾼들의 비웃음을 사면서 떨어지고 말 것인가

 

떨어져서 손가락질 당하느니, 악어의 밥이 되느니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은가

상처투성이 그대로 쉬는 게 좋지 않은가

 

눈을 감았다

가장 낮은 구렁을 지나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그 옹달진 구렁

 

그래, 더 이상 -잃을 건 없어

더 이상 낮아질 여지가 없어

 

끝은 또 다른 시작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상징

 

나는 온몸에 힘을 뺀 채 담담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작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도(中道)  (0) 2009.09.16
물이 흐른다  (0) 2009.09.16
머리말과 차례  (0) 2009.09.14
너와 나  (0) 2009.09.14
연 정 (戀情)  (0) 2009.09.14